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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영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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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사아트센터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5-09-0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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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영 개인전

전시명 오기영 개인전
부주제 細花
전시장소 B1F 제1전시장
전시기간 2025. 09. 10 - 2025. 09. 29
작가 오기영
전시관 제주갤러리

전시회 설명

기억의 원풍경

 

김해리(전 아트인컬처 선임기자)

 

오기영은 지난 20여 년 이상 전통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을 동시대적으로 변용해 왔다. 콩즙, 들기름, 흙 등의 천연 재료로 밑바탕을 만들고, 안료를 겹겹이 쌓아 올리거나 색지를 콜라주해 전통의 현대화를 모색했다. 대량 생산된 기성 재료가 아니라 자신의 작업에 알맞게 개발한 핸드 메이드 재료는 엄청난 강도의 노동과 집요한 인내를 요구한다. 사실, 미술에서 소재와의 격투는 필연적이다. 예술가가 작업에 사용하기로 결정한 재료가 어느 정도간 최종 형상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가령 깃털처럼 가벼운 재료로 육중한 매스의 기념비적 조각을 조성하거나, 맑고 투명한 수채화로 거친 마티에르의 표현적 회화를 그리는 데는 다소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오기영이 장인의 태도로 벼려온 전통 기술과, 그것으로 창안한 독특한 재료의 작업은 자극적인 유행을 빠르게 소비하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고루한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인 전통을 현대의 조형으로 부활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전근대의 산수화나 인물화 같은 도상보다도 종이, 직물이라는 물질 인자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2020년 이래 오기영은 <세화> 연작으로 건식 벽화 기법에 천착했다. 건식 벽화 기법이란 쉽게 일컬어 전통 벽화의 제작 과정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청자토와 같은 흙과 찹쌀 풀을 적절한 배율로 섞고 주물러 바탕 재료를 만들고, 이것을 황마포에 여러 차례 덧칠하고 건조해 밑판을 준비한다. 여기에 백토를 반복해 칠한 다음, 제주 자연을 포착한 이미지를 본뜨듯 드로잉한다. 옮겨낸 밑그림을 따라 양각 판화처럼 파내고, 전체적으로 채색을 가한 뒤 은박을 부착해 완성한다. 늘 그러했듯 전통과 과거의 혈맥 잇기가 건식 벽화 작업의 저변에 있다.

그러나 <세화> 연작이 내포한 의미는 방법론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기영의 <세화>추상 풍경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추상과 풍경. 구체적인 형태가 사라진 추상과 특정 풍광을 재현한 풍경은 각자 다른 평행선을 달리는 듯 보이지만, 그의 작업에서는 이질적인 두 항이 묘한 접점을 형성한다. 추상과 구상, 인공과 자연, 현실과 상징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했다 달아나곤 하는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든 묘하게 성립되는 추상 풍경의 이차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하나씩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세화> 연작은 양식적으로 추상에 분류될 수 있다. 요컨대 그의 그림을 처음 마주한 관객은 화면을 부유하는 선과 면, 색을 먼저 인식하지, 이미지의 출발이 되는 제주 자연을 한눈에 유추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제목을 보지 않는 한 말이다.) 여기서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 <세화> 연작이 나오기까지의 배경을 살펴보자. 오기영은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서 나고 자랐다. 여전히 그곳에 기거한다. 종종 그는 제주 구석구석을 걷는다. 제주에서의 산책은 제주를 향한, 제주에 대한 관찰과 사색으로 이어진다. 산책이라는 신체적 움직임이 제주성 모색이라는 정신적 활동에 육박하는 것이다. 그는 팽나무, 현무암, 바다 등의 제주 자연물에 눈길을 주고, 감상하고, 카메라로 촬영한다. 이후 사진을 구획, 확대, 크롭해 자연의 일부를 그의 시선으로 편집한다. 일련의 제작 단계에서 오기영은 제주 자연물의 형상을 추상적으로 탈바꿈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건식 벽화의 드로잉 본에 해당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제주는 삶과 예술을 지탱하는 밑받침이다. 그러니 최종 화면에는 거친 파도가 굽이치는 바다, 신령스럽게 뻗은 팽나무, 구멍 숭숭 난 현무암과 같은 명확한 형태가 아니라 비정형의 꿈틀대는 기운생동만이 남는다. 이를 그의 마음에 아로새겨진 제주의 그림자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제주 자연에 대한 심리적 요동이 <세화>에 담겨있다. 미니멀한 추상 요소와 부조적 구상 요소를 품은 <세화> 연작은 대상과 배경의 경계가 무너진, 어느 한 지점에 무게 중심이 기울지 않은 올오버(all-over) 페인팅의 형식에 다가간다. 때문에 <세화> 연작은 2020년대 어느 날의 제주라는 구체적인 시공을 초월해 있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 다수 출품된 <세화(제주바다)>는 그냥 제주 바다가 아니다. 그 이상이 된다. 세상 모든 바다로도 읽히는 그의 <세화>는 재현의 범주에 가둘 수 없는 추상화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그림은 풍경화이다. 새삼스럽게 돌이켜 보면, 그의 예술적 관심은 늘 풍경과 맞닿아 있었다. <도시-사라진 풍경> 연작(2003~12)은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생활했던 시절, 무분별한 개발로 황폐화되어 가는 풍경을 그린 작품이었다. 또한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근무한 경험에서 출발해, 각종 제주의 유물을 전통 종이 기법을 활용한 콜라주 작업 또는 옹기 모양의 입체 작업으로 변주한 <제주 시간을 입히다> 연작(2014~20)은 제주의 오래된 역사 풍경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한편 이 작업들은 작가가 실제로 둘러싸여 있는 일상 풍경이기도 했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세화> 연작은 도시에서 섬으로, 현대에서 과거로, 현실에서 역사로, 원경에서 근경으로 포커스를 조정해 온 오기영 작업의 궤적을 드러낸다. <세화> 연작은 제주 자연에 깃들어 있는 아득한 기원의 풍경인 셈이다. 이제 그 풍경은 역사와 문화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 사회가 공유하는 풍경의 원형, 이른바 원풍경(源風景)’에 도달한다.

원풍경의 원은 근원(proto)이다. 뿌리의 기원인 고향이다. 작가가 건식 벽화 작업의 첫 시도로 어머니의 고된 삶을 연상시키는 팽나무를 대상으로 정한 점도 이와 연관해 있으리라. <세화>는 지리적 고향(제주)과 심리적 고향(어머니)의 집합체이다. 오기영 작업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기거하는 운명의 땅이자 정신의 집인 고향(원풍경)을 향해있다. 이 지점에서 그가 제주 자연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벽화 기법으로 붙들어 새기는 행위도 이해해 볼 수 있다. 공동체의 안녕과 무사를 빌기 위해 벽화를 그리고 제의를 지냈던 고대인의 염원과 그의 마음은 다를 바 없으므로. 바다를 택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다란 만물의 터전이다. 오기영은 바다에서 어머니를 보았다. 바다 해()에는 어머니 모()가 들어있다. 최초의 생명 세포를 잉태한 태고의 바다와 어머니의 양수는 동일한 지평을 공유한다. 이렇게 원점으로 추동되는 그의 <세화> 연작은 작가 개인을 넘어 모든 인류의 DNA에 새겨진 기억의 사진첩이다. 원풍경은 가까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