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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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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사아트센터
댓글 0건 조회 8회 작성일 25-07-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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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 초대전

전시명 서용 초대전
부주제
전시장소 1F 본전시장
전시기간 2025. 07. 17 - 2025. 07. 28
작가 서용
전시관

전시회 설명

서용, 돈황벽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다

 

敦煌, 돈황이라. 돈황, 얼마나 환상적인 발음이었던가. 의 장막이라던 시절, 즉 중국이라는 국호 대신 중공이라고 불렀던 시절, 나는 빛 바랜 책갈피에서 돈황이란 말을 접하고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던 추억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쟁투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갈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그러니까 더욱더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올라 안타깝게 하던 곳이었다. 돈황은 돈황학敦煌學이란 용어를 낳게 했듯이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이룩한 세계적인 보배이다. 그곳은 고대 동서문화 교류의 현장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실크로드의 화려한 꽃이기도 했다.

1988 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 나는 중국 대륙을 여행할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그것도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일정 동안 백두산에서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나그네길을 이룩해 낼 수 있었다. 이 중국 여행은 나의 인생 행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실크로드와의 만남이었다. 또한 실크로드 한복판에 돈황이 있었다. 19889, 나는 돈황에서 눈물을 흘렸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돈황을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다니!

돈황과의 인연은 곧 본격적인 열애관계(?)로 발전되었다. 나는 수시로 현지에 달려가 애정을 확인하곤 했다. 한여름이건 한겨울이건, 계절을 탓하지 않았다. 아니, 어느 해인가는 신년의 태양을 돈황에서 맞이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보다 본격적으로 돈황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처지가 안쓰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하여 나는 우리의 후학이 이곳 돈황에서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기회가 하루라도 빨리 오기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인가. 늘 하던 연례행사처럼 나는 실크로드 기행단을 인솔하고 돈황에 갔다. 거기서 나는 뜻밖의 미술학도를 만나고 들뜬 기분을 가졌던 바 있다. 돈황학의 현장에서 젊음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축복을 만끽하고 있던 미술학도는 바로 서용이었다. 그는 활기찬 어조로 돈황의 생활에 대하여, 자신의 연구에 대하여, 아니 돈황학의 현황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모국어로 듣는 돈황에 대한 이야기는 출발부터 동지적 관계로 묶어 주었다.

서용은 학부에서 채묵彩墨의 전통회화를 연구하고 이어 북경으로 달려가 중앙미술학원 벽화과에서 석사를 마쳤다. 이어 그는 현장에서 돈황 벽화와 본격적으로 대면하면서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는 난주대학蘭州大學에서 돈황학 박사학위로 이어졌다. 참으로 고군분투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하기야 문무겸비라는 것이 말과 같이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이제 학문적 배경은 창작생활로 이어져 본격적인 작품으로 연결되고 있다. 돈황과 벽화라는 그의 독특한 연구성과는 그의 창작에 남다른 기대를 걸게 하는 요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후예이면서도 오늘날 미술계에서 벽화는 소홀히 대접받는 상황인지라 그의 활약을 더욱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돈황의 꽃은 막고굴 석굴이며, 그곳은 채소彩塑와 벽화로 가득 채워진 사막의 미술관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기련산맥과 고비사막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 사이, 즉 삼위산맥 언저리의 명사산이 있는 곳, 거기 하천을 따라 이루어진 절벽에 굴을 뚫고 석굴사원을 이룩하였다. 바로 돈황의 막고굴 석굴이다. 이는 4세기 중반 처음으로 뚫기 시작하여 원나라 때인 14세기까지 시대를 달리하면서 꾸준히 경영되었다. 1000년 간 조성된 작품, 그것은 연대기상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현재 확인된 석굴의 숫자는 492개로, 천불동千佛洞이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다. 각각의 석굴에는 소상塑像 2000여 구, 그리고 사방을 가득 메운 벽화, 벽화의 총면적만 해도 4500m2로 길이로 치면 45km에 해당한다. 실로 엄청난 규모에 감읍할 따름이다. 어떻게 사막 한가운데에 이렇듯 엄청난 규모의 조형물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이들 석굴의 전성시대는 역시 당나라 시대로 현존 석굴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 하기야 당나라 당시 돈황의 인구는 2만 명 가량, 그 가운데 스님만도 1000명 정도였다니 인구 스무 명에 한 명이 승려였던 셈이다. 이렇듯 돈황 불교의 흥성은 곧 막고굴 조성에도 반영되어 화려한 석굴사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돈황 벽화의 찬란함도 고난의 세월을 맞기도 했다. 오랜 동안의 폐허는 20세기 초 그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장경동臧經洞의 유물은 세상을 흥분하게 한 바 있다.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장경동에서 나온 귀중한 인도 여행기가 아닌가. 돈황은 우리에게 결코 강 건너의 등불만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고대의 코리안들이 돈황 현지를 방문했을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실크로드의 유산은 이 점을 입증한다.

서용이 돈황에서 오랜 세월 동안 연찬한 것도 결코 예사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화가에게 있어 돈황은 매우 훌륭한 스승이었을 것이다. 대만의 장대천張大千이 일찍이 돈황에서 벽화를 모사하면서 필력을 기르지 않았던가. 한동안 동양의 피카소라고 칭송받으며 작가 활동을 했던 장대천의 기초에 돈황 벽화가 있음을 숨길 수 없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전이모사傳移模寫를 중시 여기는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돈황 벽화 모사는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돈황에서 서용의 벽화 모사 작업도 적지 않은 성과를 안겨 주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의 창작품 속에 돈황 벽화의 율조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서용의 근작은 돈황 벽화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운 조형 의지를 가미시킨 작업이다. 사방연속문양처럼 일정한 크기의 화불化佛을 화면 가득히 배치하고, 중앙에 별도의 불화를 넣어 핵심을 이룬 작품은 정공법의 산물이다. 돈황 벽화 가운데 천장 그림으로 가장 아름답다는 제390굴의 경우가 생각나는 형식의 그림을 말한다. 그의 <상구보제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든가, <수하설법 천불도樹下說法 千佛圖>같은 작품이 이 경우에 속한다. 이들 작품은 아마 인고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공력을 요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변상도 계통이라든가, 불화의 한 부분을 응용한 것, 혹은 돈황 벽화의 한 부분을 응용한 것 등 다양한 작업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용의 작품은 돈황 벽화를 기본으로 하여 '창조적 계승'의 창작 의지를 읽게 하지만, 무엇보다 불화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특징을 주목하게 한다. 전통적 방식을 존중하면서 부분적으로 현대적 감각을 부여했다. 이는 단순히 모사 수준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의 진입을 의미한다. 아마 돈황 벽화가 지니고 있는 원색의 화려함 대신에 중후한 색채로 바꾼 것도 그러한 의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서용 작품에서 불화의 현대화 혹은 벽화의 현대화 작업의 가능성을 점쳐 본다. 두 부분 모두 중요하다. 이는 우리 화단의 약한 고리로 새로운 돌파구를 요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돈황에서 7년 이상 연구해 온 서용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음은 바로 위와 같은 문제에서 비롯한다. 다만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돈황 벽화 역시 불화라는 점이다. 벽화의 기법 연구로 돈황을 주목했을지라도 내용은 불교적 세계관의 조형적 표현이라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기법만 가지고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형식은 충실한 내용을 담보할 때 더욱 빛나는 법이다. 기법이나 형식에서 이제 내용까지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자세를 점치게 한다. 돈황의 위대함은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본다. 각각의 시대마다 그 시대에 걸맞은 시대정신을 창출했다는 점, 나는 이 점을 주목한다.

서용으로 하여 돈황은 이제 우리 곁에 있는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윤범모 (미술평론가)